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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를 생각한다. - 장동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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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996f5471d71fde460b8da76bb0b8a_1583909 글쓴이 : 장동민 (백석신학대학원 교수)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를 생각한다 (1)

 

코로나19 사태로 온 나라가 마비되었다. 모든 국민이 공포에 떨면서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혐오의 바이러스가 모두의 마음을 좀 먹고 희생양을 찾아 그를 비난함으로 분노를 삭인다. 이 와중에도 바싹 다가온 총선을 생각하며 정치인과 언론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공포를 극대화하고, 이에 따라 민심은 요동친다.


그럼 교회는? 코로나19 이후 교회에서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참에 신천지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일에 회집하는 문제다. 둘 다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나, 너무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교회라는 종교 단체의 존립에 관한 문제이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천하를 다스린다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코로나19 사태의 배후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 그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다행히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선 성경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이 글이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담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 원한다.

 

# 장면1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성경에는 전염병 창궐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한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민수기 16장, 소위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고라’라는 레위사람이 백성의 지도급 인사들 250명과 더불어 모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땅이 갈라져 산 채로 음부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이를 목격한 백성들이 회개하기는커녕 모세를 더 심하게 원망하였고, 하나님은 전염병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였다. 여기까지는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이다.
그 전염병은 전염 속도가 매우 빨라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열이 오르고 얼굴이 검어지고 피를 토하며 죽기 시작하였다. 모세는 당시 대제사장 격인 그의 형 아론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아론이 향로에 제단 불을 담아 비참한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하나님은 진노를 멈추시고 전염병이 그쳤다 한다.(민16: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무슨 의미인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수십만 명이 광야에서 야영을 하고 있다. 저 북쪽 진영에서부터 전염병이 점차로 퍼져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진영을 뒤덮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죽음의 천사가 무서운 모습으로 서 있다. 대제사장 아론은 그 죽음의 천사를 막고 섰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죽음의 천사여, 이 백성을 모두 죽이시렵니까?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밟고 지나가십시오.” 그는 지금 온 몸으로 이 죽음의 천사와 전염병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론의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거두셨다. 죽음의 천사는 물러가고 전염병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 장면2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부터 거의 5백 년이 지난 후 또 다시 전염병이 이스라엘을 휩쓸었다. 다윗 왕 말년에 그는 인구조사의 죄를 범하였다. 그와 그의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지하는 교만이 싹텄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한 번 전염병을 통하여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였다.
이번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죽음의 천사를 보았다. 다윗도 천사를 가로막고 기도하였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24:17) 고라 사건 때의 대제사장 아론과 같은 마음을 다윗도 품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백성들의 목자로 세우셨기에 생명을 바쳐 양을 지키는 것이 목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던 손을 거두셨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고, 대제사장이나 목자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가로막고 용서를 구하였다. 이 장면들에서 하나님은 마치 백성들을 공격하는 대적처럼 보인다.

“나를 막는 사람이 있다면”

다윗 때로부터 다시 5백 년이 지났을 때 대적으로서의 하나님이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겔22:25-31) 에스겔이 사용한 은유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밤중에 공성전을 펼쳤다. 전투가 극심하여 성벽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다시 성벽을 쌓든지 아니면 그 무너진 지점을 사람이 지켜야 한다. 날이 밝아 다시 적군이 공격하는데, 성벽을 쌓지도 않고, 무너진 부분을 막아서는 장수도 없다. 성벽이 뻥 뚫린 채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짐작했겠지만, 여기서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적군은 바로 하나님이다. 재앙을 손에 들고 공격해 오는 하나님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탄식하신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겔22:30-31) 왕과 고관들도, 제사장과 예언자도, 백성들 중 누구도 공격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멸망당하였다.

하나님의 두 손

여기서 잠깐,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하여 혼선이 온다. 하나님은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지키는 분이 아니시던가?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치는 적군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공격하는 적군을 막고 있는 대제사장 아론이나 백성의 목자 다윗은 또 어떠한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백성들을 감싸고 용서해 달라 하고, 하나님은 이들의 얼굴을 보아서 용서해 주신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많다는 말인가? 이들은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의 영화 “타이탄”의 페르세우스처럼 신(神)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인가? 포학한 아빠의 주먹을 몸으로 받아내며 아이를 지키는 엄마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하나님에게는 두 손이 있다. 렘브란트가 ‘탕자의 귀환’에서 묘사한 것처럼, 책임 있게 세상을 다스리며 정의를 세우는 아버지의 단단한 왼손과 그 손에 매를 맞은 아들을 싸매어주는 엄마의 부드러운 오른손이다. 대제사장 아론이나 목자 다윗은 두 번째 손을 기대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오른손을 대표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모든 중보기도는 적대자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행위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자신의 이름을 책에서 지워달라고까지 한 모세의 기도, 7년 가뭄을 그치게 한 엘리야의 목숨을 건 기도 등등. 그리고 중보기도의 진수는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기도하신 우리 예수님이시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정의의 심판자라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임을 설교한 목사님들을 비난하는 글이 SNS에 많이 올라와 있다. 이 엄중한 사태에 대하여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맞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맞는다면 그에게 심판하실 권리도 있지 않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척척 들어주시는 맥가이버칼 같은 분이나,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애완 고양이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계셔서 우리가 그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자(他者) 중의 타자이고, 모든 인간 문명에 대하여 ‘NO’를 선언하는 심판주이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앞에 나갈 수밖에 없는 진노의 하나님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성경의 전염병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당을 지어 모세를 거역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였고,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오만을 품었다. 에스겔서(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죄를 언급한다. 왕들은 사자가 먹잇감을 움키는 것처럼 사람들의 재산과 몸을 삼켰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가르치지 않았고, 고관들도 불의의 이익을 얻으려고 백성들의 피를 흘렸고, 예언자들은 높은 자들의 악행을 미화하였고, 평민들은 가난한 이웃과 외국인을 차별하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오만과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직접 알려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목사의 좁디좁은 안목으로 평소 싫어하던 세력에 대하여 혐오와 저주를 퍼붓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 밖에 있는 타자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겔9:6; 벧전4:17)
그러므로 전염병 대유행 같은 재앙이 시작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선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한다. 나와 우리 한국교회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지 깨어 기도하며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잘 하고 있는데 나라꼴이 문제라고? 중국이 문제고 신천지가 문제라고? 나는 에스겔서(書) 22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목록을 읽을 때 글자 그대로 한국교회를 심판하는 것 같아 무섭고 떨린다. 교회가 세상의 죄악을 판단하는 것은 우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을 판단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현대문명의 오만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겸비한 이후에나 할 수 있다. 사족을 한 가지 붙이자면, 겸비하고 회개할 때는 홀로 골방에 앉아서 얼굴을 땅에 대고 회개하자. 큰 거리 어귀에 모여 서서 큰 소리로 회개하지 말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는 것이지 회개 ‘운동’을 벌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섰던 아론이나 다윗의 행동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과 교회의 죄악을 회개하면 되는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면 되는 것인가? 오늘날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에 선 사람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2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 한다.

 

이미지: 문구: '-19 CORONAVIRUS DISEASE 2019'
 
 
<2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를 생각한다 (2)

우리 시대의 제사장은 누구인가?

 

다시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가로 막은 사람은 아론이었다. 그는 제사장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후 아론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역사 대대로 제사장이 되었고, 과거 아론이 하던 일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 역할을 계속하였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제사장은 누구인가? 목사들은 아마 자신들이 이 시대의 제사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도들을 심방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도드려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선포하니 말이다. 아니면 박식한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주의를 떠올리면서 모든 성도들이 다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구약의 직분과 현재의 직분을 쉽게 동일시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시대와 우리 시대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시대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 시대는 신정(神政) 정치 시대였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된 세속국가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의 직분은 영적 의무와 사회적 역할이 분화되기 전, 이 둘을 동시에 맡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 제사장의 역할을 오늘날은 누가 담당하는지를 알기 위하여서는,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 ‘제사장’은 그 사회 속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흔히 구약 시대의 직분을 제사장, 왕, 선지자의 3직(職)으로 규정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제사장이 그 숫자나 역할 면에서 왕이나 선지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였다. 고대국가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제사장이 왕궁 관리의 하나로 취급된 적도 있으나,(예, 삼하8:17) 왕궁 밖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제사장은 단순히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국에 수백, 수천의 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순번을 기다렸다가 성전에서 섬겨야 하였다. 그 외의 대부분의 시간에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사는 방법을 자문해 주고, 한센 병이나 여성의 부인병 등을 진단하여 공동체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재판을 담당하였다. 이들이 사는 곳은 성전 주변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위치한 도피성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있는 곳 어디든지 함께 살았다.


오늘날로 치면, 제사장은 법조인, 의료인, 공무원, 교사, 목회자 등 공적 서비스(public service)를 담당하던 ‘공복’(公僕)이었다. 오늘날은 사회가 복잡하게 분화되어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제사장의 업무를 나누어 맡고 있는 셈이다. 제사장들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대신 백성들이 낸 십일조를 가지고 생업을 삼았으니, 다른 말로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

제사장의 사회적 역할을 이렇게 규정하고 보니, 전염병이 창궐하는 오늘 대한민국에서의 제사장이 누구인가는 명확해 진다. 의료진과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보건당국과 정부인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가 하는 일을 보자. 그들은 과거 아론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의심 환자들이나 확진자들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문진하고, 검체(가래)를 채취하고, 분석한다. 주사를 놓고, 약을 처방하고, 수술을 하고, 밤새 간호를 한다. 위급해 지면 주저 없이 몸에 올라 타 CPR을 하고 에피네프린을 주사한다. 바이러스를 내뿜는 환자와 의료인을 구분하는 것은 얇은 방호복과 비닐장갑과 고글뿐이다. 환자들은 그들의 손으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돌봄을 받는다. 때로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죽기도 한다. 그야말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노하는 하나님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방어하고 건져내려 한다. 의사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내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사명감에 이끌려 의사가 된 것도 아니고, 직업의식도 그리 투철하지 않으며, 돈과 명예를 쫓는 속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얀 거탑”이나 “스카이캐슬”에서 의사들의 삶을 엿볼 때 혹은 뉴스에 가끔 나오는 대한의사협회의 주장을 들을 때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러나 의료인은 본디 제사장의 후예다.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비상시국이 되면 제사장으로서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확진자가 폭증하는 대구시로 자원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도, 밥 먹을 틈도 없이 움직인다. 잠시 시간이 나면 쪽잠을 자고 다음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한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 때문에 흘러내리는 고글을 올리다가 바이러스에 오염되기도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오른손이다.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누그러지고 전염병을 옮기는 죽음의 천사는 물러간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이들의 전문가 소견을 경청해야 한다. 의료진 뿐 아니라 그들을 관리감독하고 행정적 지원을 하는 방역당국의 말에도 기쁘게 따라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롬13:4) ‘사역자’라 하면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인줄 아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목사들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자신의 기도와 목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출 줄 아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그리스도인 의료진의 역할이 중요하다. 모든 의료인들이 제사장인 것은 맞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전문직을 가지고 공적 서비스를 하는 분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실 것을 믿으며, 매 순간 겸비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용기를 가지고 기쁨으로 섬기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장을 통하여 환자들의 육신을 치료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에 위로와 안식을 주신다. 사실 나는 이런 ‘사역자’가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최후의, 그리고 슬프게도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할 일은?

의료인만이 우리 시대의 제사장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났기에 그들이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것일 뿐, 앞서 언급한 공공 서비스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제사장들이다. 예컨대 세월호 사건 때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학생들에게 주고 죽음을 택한 선생님들이 제사장이었다. 만일 그 선생님들이 없었더라면, 이 일 후에 일어난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공복’들의 이기적인 행태 때문에 우리 사회가 완전히 결딴났을 것이다. 하나님을 막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이 선생님들의 희생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의 역할은 없는 것인가? 단지 공공 서비스 직종을 가진 성도 개인이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는 일을 할 뿐인가? 앞에서 나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의 직분은 영적 의무와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맡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영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첫째,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전서 2:9의 말씀처럼 모든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으로서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여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을까? 세상을 위한 기도이다. 대제사장 예복의 가슴에 있는 12 보석이 상징하는 것처럼, 제사장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죄 지은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깨끗한데 세상은 죄로 가득하니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죄악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삼하24:17), 예레미야처럼 입을 땅의 티끌에 대고 잠잠히 기도하며(렘애3:28,29), 바울과 같이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고후11:29)


둘째, 목회자가 제사장이다. 목회자는 사회적 공복의 하나이면서도 매우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종이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오직 그의 말씀 선포와 삶을 통하여서만, 이 세상의 사역자들이 무슨 일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가 알려진다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고, 먼저 자신이 기도해야 한다. 그는 성도들 가운데 공적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명감을 불어넣어야 하고, 자신이 먼저 사명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비함만이 진노 중의 긍휼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야 하고, 모든 회중에 앞서 더욱 겸비해야 한다. 그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우리 사회에 평안과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서 먼저 자신의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경험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라는 기관(혹은 비즈니스)을 운영하는 운영자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교회의 운영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고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논의를 여기서 그치고 마는 협량(狹量)이 안쓰러웠다. 교회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이번 생애에는 정녕 어려운 것인가.
제사장이 가지지 않아야 하는 마음 한 가지를 들라면 차별과 배제다. 혐오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앞서 가신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 한 가지 제발 부탁인데, 목회자들이 최소한 욕 좀 안 하면 좋겠다. 웬 살벌한 육두문자를 그렇게들 쓰는지, 어디서 그런 저주 섞인 욕설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신천지 교인들에 대하여서도 그들의 가르침과 전도 방식을 미워할지언정, 그들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신천지 개종자 가운데 젊은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신천지의 실상을 알게 된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셋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여지는 영적인 기관이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가진 사회적 기관이다. 교회 건물은 절간처럼 산 속에 서 있거나, 성당처럼 높은 곳에 서 있지 않다. 교회는 주택가 한 복판에, 아파트 상가의 2층에, 사무실 한 칸을 빌려서, 가정집 안방에,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회의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제사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 것이다. 마스크가 필요하면 마스크를, 손 세정제가 필요하면 손 세정제를,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선물과 손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중국에 선교하려고 별별 노력을 기울이는데, 하나의 마스크로 이틀을 견디고 남는 것은 모아서 중국에 보내면 어떨까? 수만 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들어오는데, 가까운 교회가 이들을 부모의 심정으로 돌보아 주면 어떨까? 많은 물질이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헌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사람들이 앉아 있는 중이미지: 사람 1명 이상, 모자, 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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